[대한행정사회신문=김진경 ]

주민대피법(가칭) 제정,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
- 재난 현장의 마지막 1분을 지키기 위해
대한민국은 지난 수년간 각종 재난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국가가 되었다. 산불, 지진, 집중호우, 홍수, 화학사고, 산업단지 폭발, 노후시설 붕괴 등 재난의 종류는 갈수록 다양해지고, 그 발생 속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지고 있다. 기술과 장비는 매년 발전하고 있으나, 정작 주민들의 생명을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절차인 ‘대피’는 여전히 정비되지 않은 채 행정지침이나 기관별 매뉴얼에 흩어져 있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국민은 “언제 대피해야 하는지, 어디로 이동해야 하는지, 어떤 절차로 보호받는지” 명확한 지침을 제공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최근의 대형 재난 사건을 살펴보면 인명피해의 상당 부분은 재난 그 자체보다는 대피 실패에서 비롯되었다. 늦은 대피, 잘못된 대피, 정보 전달의 오류는 곧바로 생명과 직결된다.
재난 현장에서 반복되는 ‘대피 실패’의 교훈
강원·경북 산불 사례에서는 주민들이 대피 시기와 방향을 제대로 안내받지 못해 차량 정체가 발생했고, 산불이 인근 생활권을 향해 확산되면서 더 큰 피해로 이어졌다. 집중호우 시기에는 지하주차장, 반지하 주택, 하천 인근 산책로가 침수되었지만, 제때 대피 정보가 전달되지 않아 주민들이 위험을 피하지 못한 사례가 반복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본질적 문제는 명확하다. 대피는 선택이 아니라 국가의 책무이지만, 한국은 이를 법률로 규정하지 않고 지침·훈령·조례 수준으로만 관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지역별 편차가 심하고, 기관별 대응도 서로 다르며, 책임 소재 또한 모호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주요 선진국은 이미 ‘대피법’을 갖추고 있다.
미국, 일본, EU 등은 이미 대피행동을 법률로 규정하고 있다. 미국의 FEMA(미국연방재난관리청)는 국가 표준과 지침을 제공한다. 일본은 ‘재해대책기본법’을 통해 대피권고·대피지시를 법률로 명문화하고 있다. 유럽 각국도 취약계층 대피지원과 대피시설 운영을 법률 또는 국가 계획에 포함해 제도화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경보 발령·대피 안내·대피시설 관리가 여러 법령과 지침에 분산되어 있어 국가 단일 기준이 부족하다. 반면, 한국은 경보 발령, 대피 전달, 대피시설 관리 등 주요 절차가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의 일부 조항과 각 부처 지침에 분산되어 있다. 이로 인해 대피행동의 국가 표준이 부재하고, 주민에게 전달되는 정보의 일관성도 떨어지며, 취약계층 대피지원 체계도 실효성이 낮다.
왜 지금 ‘주민대피법’인가
· 재난 속도가 예측을 뛰어넘는다
산불은 분당 수십 미터씩 확산하며, 홍수는 시간당 100mm 이상의 강수량이 흔해졌다. 기존의 매뉴얼 기반 대응은 한계에 도달했다. 재난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법률 기반의 즉각적 대응 체계가 필요하다.
· 도시재난의 특성이 복잡해졌다
지하철, 지하도로, 공동구, 대심도 배수시설 등 지하공간이 확대되면서 대피 동선은 과거보다 훨씬 정교한 관리가 요구된다. 단순 안내로는 충분하지 않다.
· 고령화 사회에서 대피는 더 어려워졌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는 국가다. 대피지원이 없으면 고령자와 장애인은 이동 자체가 어렵다. 이는 대피행정의 법제화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핵심 이유다.
· 디지털·AI 기반 대피행정으로의 전환
CAP 기반 재난문자, GIS 기반 위험지도, AI 예측시스템, 국가재난안전통신망(PS-LTE) 등 기술은 발전했으나, 법적 근거가 없어 현장에서 일관되게 운영되지 못한다. 기술을 제도와 연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 책임체계의 명확화
재난 발생 시 “누가 대피지시를 발령하는지”, “대피시설 관리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 법률이 없는 상태에서 대피는 결국 ‘관행’이나 ‘임시 판단’에 의존한다.
주민대피법이 갖추어야 할 핵심
주민대피법은 단순한 법률이 아니다. 앞으로 대한민국이 재난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체계를 법제화하는 작업이다. 대피명령·대피권고의 법적 근거 명확하게 하여 모호한 판단을 제거하고 대피지시 기준을 법률로 정해야 한다. 재난문자(CBS), 방송, 경보시스템, 스마트폰 앱, 마을방송, 차량 전광판 등 다중 채널을 통합해 전국 어디서나 동일한 정보가 즉시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유형별 대피 표준절차(SOP)를 법제화하여 화재, 홍수, 지진, 폭발, 화학사고 등 모든 유형별 대피절차를 국가 표준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취약계층 대피지원 법적 의무화하여 고령자·장애인·임산부·아동 등은 대피지원 등록제, 지정도우미 제도 등을 법률로 보장해야 한다. 대피시설의 법적 기준과 인증제 도입하여 학교, 체육관, 공공시설 등 대피장소의 설비 기준·관리 기준을 일원화해야 하고 주민 대피훈련을 단순 시범훈련이 아니라 주민 참여형 대피훈련으로 연 1회 이상 법정 의무화해야 하며, 실효적 훈련을 위한 예산 확보도 법률로 정해야 하고, GIS 기반 대피지도 의무화하여 침수위험지도, 산불확산도, 지진 붕괴 예측도 등 위험지도를 주민 대피행정의 표준자료로 지정해야 한다.
주민대피법은 국가가 국민에게 보장하는 생명보호의 약속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대피행동은 재난 대응의 마지막 단계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여전히 대피를 법률로 정비하지 않은 채 여러 지침에 의존하는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재난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고, 그때마다 국가의 대응이 ‘준비되어 있었는지’ 여부가 인명피해를 결정하게 된다. 주민대피법은 단순한 행정법이 아니라 국가의 존재 이유를 직접적으로 구현하는 법률이며, 국민 생명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주민대피법(가칭) 제정과 행정사의 역할
주민대피법이 제정되면 행정사는 재난행정의 최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지자체와 공공기관의 대피계획, 안전관리계획, 취약계층 대피지원 계획 등에 대해 법적 타당성 검토와 행정절차 자문 역할을 수행하고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대피지원 등록제 등 복잡한 민원 절차에서 신청·등록·정보 확인·증빙 제출 등 실제 행정 절차 대행이 가능하다. 아울러 대피명령이나 강제대피 조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이의신청, 행정심판, 보상청구 등의 절차에서 주민을 대신하여 권리구제 업무를 수행하며 지역사회 단위의 재난교육·대피훈련 기획 및 컨설팅을 통해 주민이 스스로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행정사는 법률과 현장을 동시에 이해하는 전문가로서, 주민대피법 체계 아래에서 국가와 주민을 잇는 실질적 조력자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주민대피법(가칭)을
“대피가 늦으면 국가도, 기술도, 장비도 사람을 구할 수 없다.” 이는 모든 재난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희생을 경험했고, 그때마다 대피체계의 허점을 확인했다. 이제는 대응이 아니라 예방과 제도화로 나아가야 한다. 주민대피법은 앞으로의 대한민국이 재난 앞에서 어떤 기준과 원칙을 가질 것인지 선언하는 국가적 약속이다.
국민의 생명은 지침이나 권고가 아니라, 법률로 보호받아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 법을 만드는 시점이다.





